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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컬럼슬픔이 있을 때는 크게 슬퍼하고 함께 슬퍼할 때 일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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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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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일보,2014년 5월)

세월호 침몰. 그것은 우리 시대의 다시없는 비극이며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죽지 않아도 되는 꽃 같은 생명들이 죽어갔고, 비리와 부패와 무능이 뒤범벅된 한국 사회의 맨얼굴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따라서 세월호 침몰 그것의 다른 이름은 애끊는 슬픔이다. 대한민국은 한 달 넘게 집단최면과 같은 큰 슬픔에 빠져있다. 세월호와 관계있는 사람들만의 슬픔이 아니라 한 하늘과 땅을 나눈 국민이기에 갖는 슬픔이 컸다. 살리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 전 국민은 통곡했다. 또 국민의 생명 하나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는 공권력을 향해 분노했다.

어린 자식이 수장된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애간장 녹는 그들의 심정이 짐작이나 가는가.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세월호 같은 사건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예비 피해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도 여전히 기득권을 챙기기와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어 있다면 가망은 없다. 천지개벽과 맞먹는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더이상 희망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선 슬퍼하는 일이다. 슬픔을 충분히 함께 나누는 일이다.

죽음을 치유하는 우리의 전통 방식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었다. 마을에 초상을 당한 집이 있으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함으로써 개인의 슬픔과 외로움을 극복하도록 도왔다. 그리고는 가장 화려한 꽃상여로 장식하여 산으로 떠나보내는 것이었다.

만약에 슬픔을 감추거나 짐짓 모르는 척하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면 그 슬픔은 오히려 해결되지 않은 독소로 남아서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슬픔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인정하여야 슬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미황사는 완도와 진도 사이에 길게 늘어선 해남의 달마산 중턱이다. 가끔 절 마당에 서서 먼바다로 지는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곳이 이번 사고 해역이다. 사고 뒤부터 나는 노을 지는 그 바다를 마음이 아파서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다.

사고 소식을 들은 날, 차가운 바다에 떨고 있을 영혼을 생각하니 산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무어라도 손을 보탤 요량으로 사고 다음날부터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팽목항으로 뛰어다녔다. 실내체육관의 가족들에게는 떡과 죽을 대접하고, 팽목항에서는 스님들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이지 않도록 했다. 시신 확인소에서는 오열하는 가족들을 달래고, 바지선의 잠수부들에게는 든든한 음식을 만들어 보내는 일을 사십여 일 넘도록 하고 있다.

 

나는 지근거리에서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세월호 사고를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이다.

첫째는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근현대에 들어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극대화되었고, 그 속에서 개인은 희생만 강요당했다. 성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성장 사회를 그리워하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 자본의 추악한 탐욕이 세월호를 잉태시킨 것이다. 배의 수명을 늘리고, 무분별한 증축과 과적을 일삼는 위험한 줄타기 앞에서 사람의 생명은 뒷전이었다. 돈이 사람의 목숨보다 앞자리를 차지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저성장사회로 접어들었으니 그때부터 세밀하고 안전한 사회시스템을 갖추었어야 한다. 또한 개인의 삶의 모습도 안정되고 검약하고 진실하게 바뀌었어야 한다.

둘째는 사고가 일어난 후 공권력의 무기력한 대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사고 직후의 공권력의 대처는 불교 경전의 ‘독화살의 비유’가 절로 떠오를 만큼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대나무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 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그동안 드러난 모습으로 보자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노력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책임 소재와 경비를 따지며 사람의 생명을 저울질하느라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놓쳤다.

정치의 본래 역할은 사회 공공성을 회복시키고 경제적 이해를 조정하고 보완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의 힘에 장악되어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시키는, 자본의 입장에 서서 그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곳에는 생명 존중도 윤리도 도덕도 문화도 역사도 설 자리가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한 재난 사고가 아니다. 한국의 급성장 신화가 빚은, 우리 현대사의 그늘진 부분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세월호가 한국 사회의 기조를 바꾸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정부는 저성장 사회에 맞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생명을 생각하고, 공적 책무를 무겁게 느끼고, 기본 원칙을 지켜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셋째는 희생자와 자식 잃은 유족들, 가족을 잃은 유족들, 친구를 잃은 학생들, 우울과 무력증에 빠진 사회의 치유에 대해 말하고 싶다.

불교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직접적 이별의 시간을 49일, 간접적 이별의 시간을 100일, 사회적 시간을 3년으로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의례적 시간이 아니라 치유에 걸리는 시간이다. 직접적인 희생자는 300여 명이지만 가족과 친지들의 상처, 그리고 연기적 관계에서 보자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슬픔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마음껏 슬퍼하고, 지혜와 자비심으로 서로를 다독일 필요가 있다. 함께 더불어 사는 따뜻한 공동체 의식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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